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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16. <부정공>범헌공휘규태(휴태)행장(凡軒公諱圭泰(休泰)行狀)
1. 문헌 목록 〉23. 23世 〉18. <부정공>우죽당공휘휴방묘갈명(友竹堂公諱休邦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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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효산규순(휴일)선생행장(曉山圭詢先(休一)生行狀)
효산규순선생행장(曉山圭詢先生行狀) 曉山 趙圭詢 선생은 玉川趙氏로서 上祖 휘 璋 고려검교대장군 문하시중 五代孫절민공 崇文의 후손인 겸암 正煥 妣 장흥 任氏의 삼남삼녀중 이남으로 一九一六年 丙辰 十一月 二十一日에 代代이 세거해왔던 順天郡 住巖面 龜山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조창건시 「忠臣은 不事二君」이라며 두문동에 칩거하신 옥천조씨 副正公의 十八대손으로 나신 선생은 信義와 剛直을 信條로 삼았던 가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기개와 愛鄉愛族의 심성을 키우셨습니다. 특히 선생이 나신 일제치하는 強壓과 收奪로 민생의 고초와 피폐가 극에 달해 선생 또한 十五세때인 一九三一年 鄉里인 주암면 광천공립보통학교 졸업을 끝으로 제도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으나 뜨거운 향학열로 東京모범중학교의 강의록을 입수하였고 집안에 독서재를 들여 漢學을 獨學했으며 구촌선생으로부터 大學, 論語, 中庸을 수학하는등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일제의 한문서재폐쇄령이 내려지자 학업을 중단하신 선생은 당시 순천군 농회에 취직, 관직에 나갔으나 一九三七년 대동아전쟁이 발발해 양곡공출 업무를 맡게되자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상대로 가택을 수색하고 쌀 한톨마저 수탈해가는 일제의 폭정을 도울 수 없다며 사표를 내어 一身의 平安을 포기하셨으니 그 결기는 후세의 귀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순천원예조합에 在職중 一九四五年 해방을 맞은 선생은 光明天地를 기쁨속에서 해방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셨습니다. 一九四八年 선생은 제헌의원 조옥현씨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들어가 일제하의 어둠을 걷고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全心全力을 다하셨으며 임기이후 고향에 내려와 地域發展과 민생안정, 文化敎育의 暢達을 위해 각 부문에서 본격적인 活動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생은 여순사건 六·二五동란 등으로 폐허가 된 지역재건과 민심수습에 헌신했으며 국가 百年大計의 礎石을 놓기위해 私財를 들여 학교를 설립하고 獎學會를 만들어 後學을 양성하셨으며 순천상공회의소를 명실상부한 경제단체로 육성해 지역내 經濟復興을 도모하고 방송국 設立, 시중 은행유치, 갱생보호사업, 새마을운동, 예총 순천지부 결성 등 平生을 오로지 地域을 위해 바쳐 오늘날 政治, 經濟, 社會, 文化, 敎育 등 각 부문에서 地域發展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선생의 업적은 후세의 師表가 되었으며 깊은 經綸과 智慧, 한없는 지역사랑의 정신은 진정한 지역의 거목, 큰 어른으로서 영원히 推仰될 것이니 그 功績과 정신을 기리고 累代토록 살아숨쉬는 숨결로 남기고자 여기에 선생의 行狀을 부문별로 정리해 전하고자 합니다. ○ 政治·社會 선생이 정치와 사회에 본격적인 參與를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건국의 터를 닦을 무렵이었습니다. 一九四八年 제헌의원 조옥현씨의 비서관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선생은 임기가 끝난 뒤 고향에 돌아오셨습니다. 당시 순천, 여수지역은 여순반란 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혼란속에 민심 또한 흉흉했으며 六·二五 동란으로 온 나라가 폐허로 변하면서 끔찍한 전쟁의 상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고향은 물론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는데는 안보가 우선돼야 한다는 각오로 順天鄉土防衛隊 부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사태수습과 지역사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수복이후 주암면 유지들과 주민들은 戰爭으로 廢墟가 된 地域社會를 복구하고 行政業務를 쇄신해 住民을 안정시키는데는 선생의 역량이 필요하다며 간곡한 권유로 선생은 주암면 부면장에 취임, 여순사건과 同族相殘의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셨습니다. 특히 동란이후 共匪討伐作戰을 위해 신상목사령관이 이끄는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지역내 주둔하자 온갖 궂은 일을 도맡으며 공비토벌작전을 도우셨으니 국가가 累卵之勢에 처한 상황에서 투철한 國家觀과 民主主義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슴속에 새기게 되셨습니다. 마침내 선생은 地域住民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그동안 쌓아온 기반을 토대로 中央政界 진출을 위해 第九代 國會議員 選擧를 시작으로 十代, 十一代등 세번의 總選에 出馬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 뛰어든 선생에게는 무서운 權力의 報復과 陰謀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情報機關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으셨고 總選拋棄를 강요받기도 했으며 자영업체는 수차례에 걸쳐 税務查察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셨으니 기업조차 위기에 처한 것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선거는 統治者의 의지를 확인하는 要式行爲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바 不正選擧와 不正開票가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선생은 落選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으니 국가와 지역의 장래를 놓고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十代 총선에서는 불과 이백여표 차이로 선생이 낙선하자 지역민들 뿐만아니라 중앙정계에서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표현이 나돌았습니다. 이때의 선거결과는 부정선거의 象徴的 事件이 되었으며 당시의 선거형태를 자성하는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선생은 개표 결과에 불복해 재개표 訴訟을 法庭에 제기했으나 大法院에서 一方的으로 棄却되기까지 했으니 선생뿐아니라 수많은 지역민들의 애석함이야 어찌할 바 없어 울분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선생의 낙선은 우리 정치사의 아픔이자 교훈이었지만 두고두고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당시 지역민들이 보내준 사랑과 성원에 빚을 졌다는 죄스러움을 지역을 위해 더욱 많은 奉仕로 갚겠다고 다짐하셨으며 선생이 이루지 못한 꿈은 장남 趙忠勳씨가 이어받아 권력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一九九五年 여당위원장으로는 도내 처음으로 五·一八특별법에 서명하는 등 소신과 신념이 확고한 政治人으로 成長했습니다. 선생은 갱생보호법이 법제화되자 法務部更生保護會 順天地域協議會長을 추대받고 前科者들의 更生을 위하는 각종 사업에 나섰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前科者가 되었지만 일반시민과 함께 건강한 社會活動을 할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개발사업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로부터 二十餘年동안 전과자들이 그늘진 삶을 清算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와 수많은 前科者들이 건전한 사회인으로 更生의 길을 걷게 했으며 政府는 선생에게 「國民勳章 목련장」을 수여해 功勞를 치하했습니다. 선생이 정치와 사회분야, 크게는 地域經營을 위해 공헌한 공로는 그동안 맡아온 다양한 직책들을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초대 순천시정자문위원, 전남도정자문위원, 사회정화위원장, 순천승주새마을운동협의회장, 전남새마을운동협의회부회장, 순천경찰자문위원장, 순천KBS방송자문위원장, 광주지법순천지원법률조정위원장,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사단법인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회장등 다방면에서 지역을 위해 봉사해 오신 것입니다. 선생은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흔쾌히 짐을 떠안으셨고 한 번 책임을 맡으신 바에는 대의를 쫓아 精進하셨으니 허울좋은 감투를 쫒아 소리를 탐하던 세태속에서 숭고한 犧牲精神과 베품의 삶으로 지역을 지탱하는 굳건한 지주가 되었습니다. ○ 經濟 선생은 일찍부터 지역내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길이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본적인 요건이며 이웃을 도울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주민들에게 필요한 일, 향후 지역내 產業發展에 基盤이 되는 分野를 찾아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생은 國家糧穀 도정공장을 農村에서 가장 시급한 사업이라고 생각해 一九五五年 국가양곡 도정공장 허가를 얻어 승주농산물가공소를 운영하셨습니다. 당시 승주일대의 농가에서는 생산된 양곡전량을 순천시내의 도정공장으로 반출해 알곡뿐 아니라 양곡의 모든 부산물과 심지어는 지푸라기조차도 생산농가에는 전혀 환원되지 않아 농민의 피해가 막심했으니 선생이 제도의 問題點을 지적하며 당국을 설득해 어렵사리 승주농산물 가공공장을 세워서야 양곡의 부산물과 짚, 왕겨 등이 농촌으로 환원되어 농민들이 마음대로 가축의 사료와 퇴비 등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선생은 一九六一年 탁월한 식견으로 산업발전에 따른 운송수요의 증가를 예견하고 순천화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運送業과 자동차정비사업 등에 뛰어들었습니다. 선생은 全南貨物自動車運輸事業組合理事長과 韓國 自動車整備事業 振興會 副會長 등을 맡아 자동차 운행과 정비에 관한 법률제정에 나서 관련 법률의 초안을 정부에 제출해 반영했으며 국내 최초로 자동차검사제도 시행을 가져오는 등 오늘날 운수업과 정비업의 기틀을 다졌으며 一九七三年 世進企業株式會社를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 각종 社會事業과 育英事業, 獎學會등 지역을 위해 奉仕할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쌓았습니다. 경제분야에서 선생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順天商工會議所를 명실상부한 지역경제인들의 단체로 성장시키신 일입니다. 선생이 商工會議所에 참여할 무렵 순천시내에 경제 규모는 극히 미미해 法人會社도 열개가 채 못되는 등 열악한 상태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商工會議所가 地域經濟의 求心點으로 성장해야 지역경제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이룰수 있다는 신념으로 우선 商工會議所 자체의 自生力을 確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선생이 一九七三年 順天商工會議所 八代 會長에 就任할 무렵 商工會議所는 職員급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여서 자비를 들여 직원들의 봉급과 운영비를 충당하면서 상공회의소 再建에 나섰습니다. 또 商工會議所 社屋新築工事 기채금의 원금은 커녕 이자조차 내지 못해 수차례의 독촉장과 지불명령서를 받는 등 압박을 받자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장 취임과 더불어 東奔西走하셨으니 당시 내무부 박경원장관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해 보조금 오백만원을 약속받았으며 태완선 大韓商工會議所 회장을 설득해 이백만원을 받는 등 대한상의는 물론 내무부로서도 유례가 없는 地方商工會議所 지원사례를 남기셨습니다. 또 허련 全南知事로부터 일백만원을 지원받아 상공회의소 신축에 따른 재정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같은 선생의 노력은 오늘날 순천상공회의소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순천경제의 구심역할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八代부터 十一代까지 선생이 四代에 걸쳐 순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해온 일들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광양제철이 들어올 때 순천이 제철의 背後都市로서 개발이익을 유치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나서 연일 각급 기관장 連席會議는 물론 학교장 회의, 料食業 대표자 회의까지 열어가면서 ‘제철건설이 순천발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부문별로 적극적인 대응을 유도, 제철건설에 따른 순천지역발전을 견인하셨으며 地域經濟構造를 生產企業 활성화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역내 特產品을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展示場인 ‘새마을 장려관’ 開設하는 등 독특한 기획으로 商工會議所를 이끌었으며 이러한 선생의 왕성한 활동은 全國商工人에 널리 알려진 대한상공회의소 監事로 선출돼 전국 상공업계에 순천지역을 알리는데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날 순천지역이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법인회사가 사업을 일구고 비약적인 번영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선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우리 經濟史의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또 선생은 韓美修交 일백주년 기념 經濟 使節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經濟外交의 일익을 담당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쳐 順天商工會議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평생 名譽會長으로 推戴했으며 정부도 대한상공회의소 창립 백주년 紀念式에서 선생에게 ‘석탑산업훈장’을 수여했습니다. ○ 敎育·文化 선생이 일찍부터 남다른 애정과 정열로 이루고자 했던 일은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부문이었으며 평생을 통해 일군 사업도 대부분 교육에 대한 소망을 이루는데 바치셨습니다. 일제하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國土와 主權이 유린당해 배우고자 해도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한을 후세에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교육시설을 갖추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주암면 부면장 시절 고향의 어린 학생들이 中學校에 進學하기 위해 통학을 하거나 客地 生活을 해야하고 가난한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도 너무 커 이를 늘 안타깝게 여기셨던 선생은 中學校 設立을 서두르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면단위 중학교 설립이 어려웠지만 선생은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며 승주군에 중학교 설립을 건의하고 전남도와 교육당국을 설득, 절충을 벌인 끝에 마침내 주암중학교를 탄생시키셨습니다. 선생은 이후 주암고등학교 설립에도 나서 교육 재정이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 高校設立에 드는 費用 때문에 학교설립은 난항을 겪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인가를 얻어낸 뒤 오천오백여평의 학교부지를 사재로 快擲해 주암고 설립에 결정적인 貢獻을 하셨습니다. 선생은 一九七○年代 再建國民運動이 전개되자 순천재건중학교 설립에 사재 일만여평을 내놓아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터주었습니다. 재건중학교는 이후 순천상업고교로 승격돼 실업계 학생들의 전당이 되었지만 부실한 운영으로 학생들이 배움의 터전을 잃게 될 위기를 맞자 선생은 一九八八年 학교법인 曉山學園을 설립하시고 이사장에 취임 하면서 순천상고를 오늘날 명문 商業高로 육성하셨습니다. 선생은 순천상고의 교육시설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校舍를 신축하고 도내 최초로 586컴퓨터 교실을 개설하는 등 정보화 시대에 맞는 교육환경을 바꾸어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주력하셨으며 「人性敎育」을 통해 학교가 건전한 사회인을 양성하는 전당이 돼야한다는 교육철학을 실천하셨습니다. 교육자로서 선생의 손길은 비단 순천상고에만 머무르지 않아 관내학교에 교육시설과 자재를 지원하는데 남다른 정성을 쏟았으며 장학사업에도 정성을 들여 一九七八年 순천지역 장학회의 嚆矢라 할 수 있는 순천장학회 창립멤버로 회장을 역임하셨고 개인적으로도 자영업체인 세진기업이 설립한 세진장학회와 玉川趙氏 문중장학회인 옥천장학회 등을 설립, 연인원 삼백오십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마음으로 교육에 정성을 다할 때 미래가 희망일 수 있다며 몸소 實踐하는 선생의 열정에 대해 중등학교 사학법인 협의회는 교육공로 봉황장을 수여했으며 수많은 교육기관과 학교에서도 감사패와 공로패를 증정하며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선생은 지역내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藝總 순천지부 창설멤버로 文化藝術人들의 활동에 贊助를 자청했으며 국악발전에 의욕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지역의 문화발전은 요원하다는 생각으로 각종 文化行事에 기업인으로서 역할을 다해오신 것입니다. 또 선생은 成均館 典學으로 推戴되어 유학의 전통을 지키고 한국인의 정신과 가치를 保存, 發展시키는 데도 몫을 다하셨으며 지역내 문화창달을 위해서는 공영방송국이 필요하다며 방송국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아 KBS순천방송국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 중계소만 있던 순천에 방송국이 들어서는 轉機를 마련하고 KBS순천방송국 자문위원장을 맡아 活動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이 六十年代부터 금융권을 설득해 지역내 중소기업, 주택은행의 순천지점을 유치한 것도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주민들이 새롬게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先見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의 獻身的인 삶은 지역주민들의 가슴에 感動을 주었고 기관과 단체, 그리고 정부에서도 수많은 勳褒章과 功勞牌, 感謝牌로 그 공로를 치하하였습니다. 선생은 一九九二年 국민훈장 木蓮章을 비롯해 產業勳章, 鐵塔勳章, 國務總理, 内務部, 法務部, 交通部長官 표창과 全南知事, 敎育監, 順天市長, 大韓商工會議會長등으로부터 勳褒章을 받으셨으며 지역민들은 선생에게 一九七三年 순천시민대상을 一九八九年 승주군민대상을 수여하는 등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백오십여개의 표창 감사 공로패장은 선생의 일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로 선생의 일생은 지역의 政治, 經濟, 社會, 敎育, 文化의 생생한 역사였으며 걸어오신 굳은 발걸음은 오늘날 지역발전의 탄탄한 시금석이 되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里程表가 되었습니다. 금번 玉川趙氏 대동보편찬에 즈음하여 선생의 위와 같은 행적을 정리하여 남김으로 해서 後世에 길이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奉獻하는 바입니다. 順天光陽商工會議所 會長 姜 順 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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